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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수 없는’ 단순 열정의 어린이세계

한미화 출판칼럼니스트

한미화의 어린이책 스테디셀러
조금만, 조금만 더
존 레이놀즈 가디너 글, 마샤 슈얼 그림, 김경연 옮김
시공주니어·5500원오로지 어린이책을 읽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가슴 벅찬 순간이 있다. 위대한 소설을 읽으며 먹먹한 감동을 느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완벽하게 순전한 세계가 어린이책 속에 있다. 대개의 소설에는 시기와 분노, 질투와 오해, 사랑과 증오가 가득하다. 어쩔 수 없다. 사람 사는 일이 그러니까.

반면 낮은 연령의 어린이를 위한 동화일수록 간명하고 분명하게 세상을 대한다. 난마처럼 얽힌 문제일지라도 단숨에 걷어낸다. 그래서 북디자이너 정병규는 어린이책의 특징 중 하나를 ‘꼼수가 없는 세계’를 그리는 것이라고 했다.

존 레이놀즈 가디너의 는 딱 그런 작품이다. 열 살인 윌리는 작은 감자 농장을 운영하는 할아버지, 나이가 많은 암캐 번개와 함께 산다. 한데 할아버지가 병이 났다. 왕진을 온 스미스 선생은 “사람이란 처음에는 마음이 사는 걸 포기하지만, 다음에는 몸으로 퍼지게 마련이고 그럼 진짜 병이 나고 마는 것이니 마음을 고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치료법이 없다”고 했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를 앓게 한 마음의 병은 농장에 부과된 과도한 세금 때문이었다. 밀린 세금을 내지 않으면 농장이 넘어갈 처지에 이르렀다. 할아버지에게는 살 낙이 없어진 거다.

열 살짜리 남자아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지만 윌리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해나간다. 어렵사리 감자를 수확하고, 가까운 어른들에게 의논을 한다. 그러다 전국 개썰매 경주 대회의 광고지를 보게 된다. 번개와 함께 늘 달리는 익숙한 코스인데다 상금 액수도 세금과 딱 맞아떨어졌다.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원주민(인디언) 남자 ‘얼음거인’이 출전한다고 어른들도 벌벌 떨지만 윌리는 출전하기로 결심한다.

소설이라면 억지스럽다고 비난받을 만한 무모한 도전이지만 어린이 세계의 ‘시민’인 윌리는 단순하게 생각하고 솔직하게 행동한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짓이다. 그래서 마을 시장은 윌리에게 어린이 대회에나 나가라고 충고하고, 스미스 선생은 윌리가 대학 갈 때 쓸 저금을 대회 출전비로 써버린 것을 두고 나무란다. 어른들이 말하는 합리적인 생각을 따르면 윌리는 할아버지를 돌볼 간병인을 구하고, 번개는 팔고, 빨리 저 혼자 살 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윌리에게 할아버지와 번개는 한 가족이며 꽁꽁 뭉쳐 있어야 했다. 윌리는 불운을 한탄하고 자기 처지를 혐오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과 할아버지와 번개를 믿고 진지하게 나아갔다.

누구나 달릴 때는 오직 결승점만을 생각한다. 만약 코앞에 닥친 프로젝트와 밀린 세금을 걱정하며 달린다면 그가 챔피언이라도 얼마 안 가 넘어질 수밖에 없다. 윌리는 달리기를 하는 순간에 느끼는 단순한 열정으로 매일을 사는 아이다. 어린이의 세계가 어른의 세계와 구별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나는 삶을 이처럼 단순한 열정으로 살아가는 윌리 같은 어린이가 되고 싶을 때가 많다.

이유도 갖가지이고 핑계도 많은 어른에게 는 마치 달리기를 하며 느낀다는 ‘러너스 하이’(힘겹게 달리다가 어느 순간 몸이 가벼워지며 기분이 황홀해지는 상태)를 맛보는 순간과도 같다.

한미화 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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